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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소희 리뷰: 우리는 몰랐다

by jan9o 2025. 9. 8.

 영화 ‘다음소희’는 2023년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남긴 작품이다. 정주리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무거운 전제를 가지고, 청소년이 겪는 사회적 폭력과 시스템의 무관심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인간극복 서사가 아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로 이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었냐고. ‘다음소희’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친구였고, 학생이었으며,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닌 죽음을 맞이한 한 청춘의 이름이다. 이 글에서는 ‘다음’, ‘소희’, ‘희망’이라는 키워드로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과 의미를 해석해본다.

그다음은 없다, ‘다음’이란 말의 무게

‘다음소희’라는 제목은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소희 다음의 이야기’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의 마음에는 이런 질문이 맴돈다. 정말 ‘그다음’이 있을까? 소희는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투입된 콜센터 현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다. 불친절한 고객 응대는 물론이고, 성적 평가 압박, 관리자의 무시, 학교의 무관심은 그녀를 점점 고립시킨다. 그리고 결국 소희는 세상을 떠난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장면은 그 비극적인 선택 이전의 일상적 고통들이다. 소희가 겪은 일은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학교와 회사는 그저 평범한 과정을 밟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평범함’이 청소년에게는 죽음보다 더 괴로운 압박이 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슬픈 점은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그녀를 학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조금씩’ 책임을 피하면서,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주 “다음에는 더 나아질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희의 사건 이후, 정말로 ‘다음’은 나아졌는가? 이 영화는 ‘다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금 이 사회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변화를 위해서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소희’라는 제목은 단순히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이 사회가 ‘그다음’을 진정 준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적 질문이다.

소희는 누구였나, 잊혀지는 이름들

‘소희’는 영화 속 한 명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청소년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영화는 소희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삶이 어떻게 외면당했는가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소희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밝고 의욕적인 학생이었으며, 친구와 웃고, 가족과 갈등도 겪는 평범한 10대였다. 그러나 그 평범함조차 유지되지 못한 채, 그녀는 시스템 속에서 파괴된다. 영화는 소희가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극적인 대사나 연출 대신, 관객은 소희의 눈빛, 멈춰 있는 표정, 반복되는 행동들을 통해 그녀가 점점 무너지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이 과정은 매우 현실적이고 섬세해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죽고 나서야 그들의 고통을 인식한다. 살아있을 땐 아무도 묻지 않았다. ‘괜찮니?’, ‘힘들지 않니?’라고. 소희의 캐릭터는 바로 그런 질문이 결여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청춘의 상징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형사(배두나 분)는 진실을 추적하지만, 너무 늦었다. 영화는 이렇듯 ‘기록되지 않은 고통’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며, ‘소희’라는 이름이 잊히지 않기 위한 기록으로 존재한다. 소희는 단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청소년의 이름들이다.

희망은 어디에, 우리가 만들어야 할 변화

‘희망’은 이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 부재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다음소희’는 관객을 절망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묻는다. 우리는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영화 속 현실은 냉정하고, 고통스럽고, 무기력하다. 하지만 이 감정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소희의 죽음을 지켜본 형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좇는다. 그리고 관객 역시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변화는 거창한 정치나 정책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영화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사는 학생의 상태에 조금 더 민감해야 하고, 실습 기관은 청소년의 인권을 고려해야 하며, 가정은 감정적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은 현재를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해지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바라는 가장 실질적인 변화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소희’가 생기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는 단지 슬픈 이야기로만 끝날 것이다. 정주리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큰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침묵 속에 관객 스스로 ‘희망’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 남는다.

‘다음소희’는 단순한 사건 재현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이 처한 현실을 고발하는 강력한 증언이다. 이 작품은 고통을 보여주되, 그로부터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는 묻는다. 다음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다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이제 우리는 기억하고, 변화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소희의 이름이 잊히지 않고, 또 다른 희망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소희 포스터
사진 출처 =트윈플러스파트너스